카네이션은 학생 대표만? 스승의 날 선물 'O·X' 총정리

 매년 5월 중순이 되면 학부모들의 온라인 커뮤니티는 교사에게 전달할 성의 표시를 두고 깊은 고민에 빠진다. 청탁금지법이 시행된 지 오랜 시간이 흘러 촌지 문화는 사라졌지만, 감사의 마음을 담은 소박한 선물조차 법 위반이 될 수 있다는 사실에 학부모들은 여전히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 교육당국은 스승의 날을 앞두고 현재 자녀를 직접 가르치고 평가하는 교사에게는 금액의 많고 적음을 떠나 어떠한 형태의 금품도 전달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명확히 했다.

 

현행법상 담임교사나 교과 담당 교사는 학생의 성적과 생활기록부를 관리하는 직접적인 이해관계자로 분류된다. 이 때문에 청탁금지법에서 허용하는 사교나 의례 목적의 선물 가액 범위 내에 있더라도, 직무 관련성이 인정되는 순간 예외 없이 금지 대상이 된다. 학교 방문 시 건네는 가벼운 음료수나 간식은 물론이고, 교사의 개인적인 경조사에 축의금이나 조의금을 보내는 행위 역시 법망을 피하기 어렵다는 것이 당국의 설명이다.

 


다만 감사의 마음을 전할 수 있는 최소한의 통로는 열려 있다. 학생 대표가 학급 전체를 대신해 공개적인 자리에서 교사에게 전달하는 카네이션이나 꽃은 사회 상규에 어긋나지 않는 것으로 간주되어 허용된다. 이는 특정 개인의 이익을 위한 것이 아니라 스승의 날이라는 상징성을 고려한 예외적 조치다. 또한 종이에 직접 쓴 손편지나 카드 역시 금전적 가치가 없는 순수한 정서적 표현으로 보아 제재 대상에서 제외된다.

 

이미 학년이 바뀌어 직접적인 지도 관계가 종료된 이전 학년의 교사에게는 조금 더 유연한 기준이 적용된다. 더 이상 성적 평가권이 없는 상태라면 5만 원 이하의 선물은 사교적 목적으로 인정되어 전달이 가능하다. 하지만 여기서 주의할 점은 백화점 상품권이나 모바일 기프티콘 등 현금성 유가증권은 금액과 관계없이 선물 범위에 포함되지 않아 여전히 금지된다는 사실이다. 졸업생이 모교 은사를 찾아가는 경우에도 직무 관련성이 없다면 법이 정한 상한액 내에서 선물을 할 수 있다.

 


어린이집의 경우 법적 적용 대상에서 다소 차이가 있어 학부모들의 혼란이 가중되기도 한다. 유치원과 달리 영유아보육법의 적용을 받는 일반 어린이집 교사는 청탁금지법 대상에 포함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육부는 보육 현장에서도 형평성과 투명성을 유지하기 위해 유치원과 동일한 수준으로 선물을 사양할 것을 강력히 권고하고 있다. 법적 처벌 여부를 떠나 교육 현장의 공정성을 해칠 수 있는 문화를 사전에 차단하겠다는 의지다.

 

결국 스승의 날의 본질은 물질적인 대가보다는 진심 어린 존경의 마음을 나누는 데 있다. 교육당국은 학부모들이 선물의 종류나 가격을 고민하기보다 아이와 함께 감사의 마음을 글로 표현하는 문화를 만들어달라고 당부한다. 법적 테두리 안에서 교사와 학부모가 서로 부담을 느끼지 않는 건강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교육 공동체를 회복하는 첫걸음이 될 것이다.

 

문화포털

AI 뒤에 숨은 실적주의, 대학 교육 본질 말살하나

 이공계 대학원 교수들 사이에서는 자신들을 연구비 확보를 위해 분투하는 중소기업 사장에 비유하는 자조 섞인 농담이 유행한 지 오래다. 연구와 학생 지도라는 본업보다 정부 과제를 따내기 위해 외부로 뛰어다니는 시간이 압도적으로 많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대학원생 급여 상한선까지 인상되면서, 수십 명의 제자를 거느린 교수보다 차라리 자기 공부에만 전념하는 학생의 처지가 더 낫다는 말까지 나온다. 이러한 부담은 결국 교수들이 학생 지도가 필요 없는 정부출연연구소나 기업체로 눈을 돌리게 만드는 원인이 되고 있다.이러한 상황에서 등장한 인공지능(AI)은 대학의 교육 기피 현상에 강력한 촉매제 역할을 하고 있다. 교수들에게 AI는 기초부터 가르쳐야 하고 끊임없이 동기를 부여해야 하는 인간 대학원생보다 훨씬 다루기 쉬운 대체재로 인식된다. 연구 과정의 상당 부분이 반복적인 단순 작업임을 고려할 때, AI는 인건비 부담을 줄이면서도 연구 생산성을 극대화할 수 있는 매력적인 도구다. 결과적으로 학생 없는 연구실이 효율적이라는 인식이 확산되면서 학술 지형 자체가 근본적으로 흔들리고 있다.하지만 AI 시대를 맞이한 대학의 이러한 변화 이면에는 위험한 의도가 숨어 있다. 대학의 본질적인 교육 기능을 외면한 채 단순한 실적 생산 기지로 남으려는 욕망을 AI라는 기술적 필연성으로 포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학이 논문을 조립하는 컨베이어 벨트로 변질되는 것은 기술의 발전 때문이 아니라, 교육의 번거로움을 털어내고 성과만 챙기려는 인간의 욕구를 AI라는 방패로 정당화한 결과에 가깝다. 시대적 흐름이라는 핑계는 교육 방치에 대한 면죄부가 되고 있다.본래 대학과 대학원은 지식을 발전시키는 동시에 다음 세대를 양성하는 전수자의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그러나 단기적인 성과에 매몰된 일부 연구자들은 교육에 들어가는 노력을 불필요한 비용으로 간주한다. 이들에게 AI는 "시대가 변해서 어쩔 수 없다"는 논리를 제공하며 지금까지의 교육 소외 행태를 합리화하는 수단이 된다. 심지어 이러한 변화에 제동을 거는 목소리를 시대에 뒤처진 낙오자로 몰아세우며 대학의 공적 가치를 훼손하고 있다.대학원에서의 교육은 그동안 연구 과제 수행 과정에서 얻어지는 일종의 '부산물'처럼 취급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 체계적인 커리큘럼보다는 노동 현장에서 부수적으로 지식을 습득하는 환경이었기에, AI의 등장은 그나마 유지되던 도제식 교육마저 끊어놓고 있다. 학생들은 연구의 전체 맥락을 파악하기보다 컨베이어 벨트의 부품처럼 협소한 영역의 작업만 반복하게 된다. 이러한 구조 속에서 학생이 독립적인 연구자로 성장할 기회는 사라지고, 대학은 오로지 우수 학술지 게재라는 수치에만 집착하게 된다.결국 AI로 인한 대학의 위기는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주체의 선택 문제로 귀결된다. 대학에서 교육을 삭제하고 싶은 이들이 AI라는 도구를 앞세워 자신들의 계획을 관철하고 있는 셈이다. 고등교육기관이 사회적 목적을 다하기 위해서는 실적 지상주의에 저항하고 배움의 가치를 복원해야 한다. 연구 성과가 곧 교육의 질이라는 안일한 가정을 버리고, 학생이 연구의 주체로 성장할 수 있는 환경을 재구축하는 작업이 시급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