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K-콘텐츠에 1.6조 '역대급' 투자 선언…'AI'로 제2의 BTS 신화 노린다

 정부가 내년도 문화·콘텐츠 산업 육성을 위해 칼을 빼 들었다. K-콘텐츠를 국가전략산업으로 격상시키고 'K-컬처 300조원 시대'라는 야심 찬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역대급 규모의 재정을 투입하기로 결정했다. 문화체육관광부가 발표한 내년도 예산안에 따르면, 문화·예술·콘텐츠·관광·체육 분야에 편성된 총예산은 7조 7692억 원에 달한다. 이는 올해보다 무려 10.3%(7,290억 원)나 증가한 수치로, 2020년 이후 가장 큰 폭의 증가율을 기록하며 정부의 강력한 육성 의지를 드러냈다.

 

이번 예산안에서 가장 주목받는 분야는 단연 '콘텐츠'다. 콘텐츠 부문 예산은 올해 대비 26.5%라는 파격적인 증가율을 보이며 1조 6103억 원이 편성됐다. 이는 글로벌 시장에서 K-콘텐츠의 위상을 더욱 공고히 하고, 미래 성장 동력을 확보하기 위한 전략적 투자로 풀이된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K-콘텐츠 펀드 출자 규모를 기존 2950억 원에서 4650억 원으로 대폭 상향하여 제작 자금 지원을 강화하고, 특히 미래 콘텐츠 시장의 판도를 바꿀 '인공지능(AI)' 분야에 대한 투자를 대폭 늘렸다. AI 콘텐츠 제작 지원 예산은 올해 80억 원에서 약 3배인 238억 원으로 증액되었으며, 'AI 특화 콘텐츠 아카데미'를 신설하는 데 192억 원을 투입해 관련 분야의 핵심 인재를 직접 양성하겠다는 계획이다.

 


창작의 최전선에 있는 예술인들에 대한 지원 역시 전례 없는 수준으로 확대된다. 특히 재능은 있지만 경제적 어려움을 겪는 청년 예술가들을 위해 '청년창작자 지원' 항목으로 180억 원을 신규 편성했으며, 국립예술단 시즌단원제 확대를 통해 안정적인 창작 환경을 제공할 예정이다. 또한, 세계적인 성과를 목표로 특정 장르에 대한 집중 투자도 이루어진다. 노벨문학상 수상을 목표로 문학 분야 지원 예산을 올해 99억 원에서 206억 원으로 2배 이상 늘렸고, 브로드웨이를 겨냥한 K-뮤지컬의 경쟁력 강화를 위해 뮤지컬 지원 예산을 올해 31억 원에서 241억 원으로 무려 8배 가까이 상향 조정했다. 이와 함께, 수도권에 집중된 문화 향유 기회를 전국으로 확산시키기 위해 공연·전시의 지방 순회 횟수를 연간 400회에서 1200회로 3배 확대하는 데 1123억 원을 투입한다.

 

국민들이 직접 체감할 수 있는 정책도 눈에 띈다. 지역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기 위해 '지역사랑 휴가지원제'가 65억 원의 예산으로 신설된다. 이는 인구감소지역으로 지정된 20개 지자체를 방문하는 여행객에게 여행 경비의 50%, 최대 20만 원까지 환급해주는 파격적인 제도다. 이 외에도 'K-푸드로드 문화관광 활성화', 'K-지역관광 선도권역 프로젝트' 등 새로운 사업을 통해 지역 고유의 매력을 관광 상품으로 개발할 계획이다.

 

체육 분야에서는 국민 건강 증진과 엘리트 체육의 선순환 구조 마련에 중점을 뒀다. 노후화된 공공체육시설 개·보수 예산을 증액하고, 어르신들을 위한 스포츠 프로그램 지원을 신설했다. 또한, 고교 졸업 후 유망주들이 육성 공백을 겪지 않도록 '예비 국가대표 양성제도'를 도입하고, 은퇴 선수의 사회 진출을 돕기 위한 일자리 지원 예산도 대폭 늘려 스포츠 생태계 전반의 건강성을 강화할 방침이다.

 

문화포털

세 번 숙청당하고 돌아와 중국 4100년의 굶주림을 끝낸 지도자

 1978년, 중국의 1인당 소득은 156달러에 불과한 절대 빈곤 국가였다. 그러나 40여 년이 흐른 지금, 중국은 미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G2 경제 대국으로 우뚝 섰다. 이 경이로운 '대굴기(大崛起)'의 중심에는 '작은 거인' 덩샤오핑(鄧小平)이 있었다. 그는 국가 주석이나 총리 같은 공식적인 최고 직책 없이, 오직 실용주의 리더십 하나로 중국 대륙을 천지개벽시켰다.덩샤오핑의 정치 인생은 그야말로 '삼전삼기(三顚三起)', 즉 세 번의 실각과 세 번의 복권으로 점철된 파란만장한 여정이었다. 마오쩌둥의 급진적인 정책에 반대하다 '우경 기회주의자'로 낙인찍혔고, 문화대혁명 시기에는 '자본주의 길을 걷는 실권파'로 몰려 모든 직위를 박탈당하고 공장으로 하방되는 수모를 겪었다. 평생의 정치적 동지였던 저우언라이의 사망 이후에는 '반당·반사회주의의 원흉'으로 지목되어 세 번째 시련을 맞았다.그러나 157cm의 작은 체구에 담긴 그의 정치적 생명력은 끈질겼다. 1977년, 73세의 나이로 세 번째 복권에 성공한 그는 1년 뒤 중국 현대사의 물줄기를 완전히 바꾸는 승부수를 던진다. 1978년 12월, 그는 '4개 현대화' 노선을 발표하며 개혁·개방 정책의 서막을 열었다. 그의 철학은 명료했다. "고양이 색이 검든 희든 쥐만 잘 잡으면 된다"는 '흑묘백묘론'으로 대표되는 극단적 실용주의였다. 이념 논쟁으로 허송세월할 것이 아니라, 인민을 배불리 먹이는 것이 최우선이라는 것이었다.개혁은 농촌에서부터 시작됐다. 집단농장인 인민공사를 과감히 해체하고, 농민들이 자발적으로 시작한 '가정연산승포책임제'를 전국으로 확대했다. 이는 사실상 토지를 가족 단위로 나누어 경작하고, 남는 생산물은 시장에 팔 수 있게 한 조치였다. 결과는 놀라웠다. 1979년 시범 마을의 식량 생산량은 6배나 폭증했고, 1984년에는 중국 5000년 역사상 처음으로 만성적인 식량 부족 문제가 해결됐다. 10억 인민을 굶주림에서 해방시킨, 역사상 최초의 지도자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농업의 성공을 발판으로 그는 선전, 주하이 등 4개의 '경제특구'를 설치해 자본주의 실험에 착수했다. 외국 자본과 기술을 받아들이기 위해 세금을 감면하고 규제를 철폐하자, 인구 3만의 작은 어촌이었던 선전은 불과 10여 년 만에 100만 인구의 현대 도시로 탈바꿈했다.1989년 톈안먼 사태와 1991년 소련 붕괴로 개혁·개방이 좌초될 위기에 처하자, 88세의 노정객은 다시 한번 직접 나섰다. 1992년 남부 지역을 순회하며 "개혁·개방을 더욱 가속화해야 한다"고 역설한 '남순강화(南巡講話)'는 보수파의 저항을 잠재우고 중국 경제가 '세계의 공장'으로 도약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흥미로운 점은 그가 내세운 '사회주의 시장경제'라는 구호다. 필자의 지적처럼, 이는 '네모난 원'과 같은 형용모순이다. 공산당 일당 독재라는 정치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자본주의'라는 금기어를 피하고 만들어낸 정치적 수사에 불과했다. 본질은 사유재산과 경쟁을 도입한 '자본주의 시장경제'였다. 덩샤오핑은 공산주의라는 껍데기는 유지하되, 그 안의 내용물은 자본주의로 채워 부유하고 강력한 중국을 만드는 길을 택했던 것이다. 이 위대한 속임수야말로 그의 가장 빛나는 업적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