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평양 가겠다" 박지원, 尹 정부 향해 초유의 '셀프 특사' 자청…숨은 의도는?

 더불어민주당의 원로 정치인 박지원 의원이 김영남 전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의 사망 소식에 깊은 애도를 표하며, 본인이 직접 조문 사절로 평양을 방문하겠다는 의사를 공개적으로 밝혔다. 박 의원은 4일 자신의 소셜미디어를 통해 유족과 북한 주민들에게 심심한 위로의 마음을 전하는 동시에, 남북 관계의 특수성을 고려한 조문 외교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그는 여건이 허락된다면 정부가 자신을 특사로 파견해 줄 것과 북한이 이를 수용해 줄 것을 동시에 촉구하며, 경색된 남북 관계의 물꼬를 틀기 위한 파격적인 제안을 던졌다. 이는 단순한 애도 표명을 넘어, 과거 남북 간 교류의 경험을 자산으로 삼아 현재의 교착 상태를 타개하려는 정치적 행보로 해석된다.

 

박 의원은 김 전 상임위원장과의 개인적인 인연을 상세히 회고하며 이번 제안의 진정성을 부각했다. 그는 과거 장관 및 특사 시절 김 전 위원장을 10여 차례 만나며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술회했다. 훤칠한 키와 수려한 외모를 지닌 조용한 외교관 스타일로 기억하며, 특히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현재의 김정은 국무위원장 모두가 그를 깍듯이 예우하던 모습이 인상 깊었다고 전했다. 이처럼 북한 최고 지도자들로부터 두터운 신임을 받았던 인물의 마지막 길을 배웅하는 것이 단순한 조문을 넘어 남북 간 신뢰를 회복하는 중요한 계기가 될 수 있다는 판단이 깔린 것으로 보인다. 개인적 인연과 존중의 마음을 바탕으로 한 그의 제안은 차가운 정치적 계산을 넘어선 인간적 교류의 복원을 호소하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이번 특사 자청의 가장 중요한 명분은 과거 남북이 쌓아온 '조문 외교'의 전통이다. 박 의원은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 당시 북측에서 김기남 노동당 비서를 단장으로 한 고위급 조문 사절단이 서울을 방문했던 사례를 상기시켰다. 또한, 김정일 국방위원장 사망 시에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부인인 이희호 여사가 우리 측 조문 사절단을 이끌고 평양을 방문했던 전례를 강조했다. 이처럼 상대방의 큰 슬픔을 함께 나누며 대화의 끈을 이어갔던 상호주의적 전통을 현 정부가 계승해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한 것이다. 이는 현재와 같이 모든 공식 대화 채널이 막힌 상황에서, 인도주의적 성격의 조문 외교가 경색 국면을 전환할 최소한의 통로가 될 수 있다는 전략적 판단에 따른 것이다.

 

박 의원은 자신의 구상을 현실화하기 위해 구체적인 행동에 나섰다. 국회에서 만난 정동영 신임 통일부 장관에게 특사 파견의 필요성을 이미 설명했으며, 국가정보원을 대상으로 한 국정감사 자리에서도 국정원장에게 같은 내용을 공식적으로 요청하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과거 문화관광부 장관으로서 김대중 전 대통령의 특사 자격으로 북측과 비밀리에 접촉하며 2000년 6·15 남북 정상회담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던 경험을 가진 그이기에 이번 제안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다. 'DJ의 특사'였던 그가 다시 한번 스스로 '조문 특사'를 자처하고 나선 것은, 꽉 막힌 남북 관계에 자신의 모든 경험과 자산을 쏟아부어 어떻게든 돌파구를 마련하겠다는 강력한 의지의 표명으로 볼 수 있다.

 

문화포털

서울 대신 갱도 택했던 화가 황재형 별세

 한국인의 땀방울과 거친 손마디를 사실적으로 그려내며 민중미술의 한 획을 그었던 황재형 화백이 27일 별세했다. 1952년 전남 보성에서 태어난 고인은 중앙대학교 회화과 재학 시절부터 사회적 약자의 삶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1981년 미술 그룹 ‘임술년’을 결성하며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 그는 탄광 매몰 사고로 희생된 광부의 작업복을 묘사한 ‘황지 330’을 발표하며 미술계에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이 작품은 당시 국립현대미술관 소장품으로 등록될 만큼 예술적 가치를 인정받았으며, 화려한 서울의 삶 대신 척박한 현장을 선택하게 된 고인의 예술 인생의 서막을 알리는 신호탄이 되었다.고인은 1982년 "가장 뜨거운 진실은 현장에 있다"는 신념 하나로 강원도 태백 탄광촌으로 거처를 옮겼다. 당시 대학가와 지식인 사회에서 담론으로만 떠돌던 노동의 가치를 직접 몸으로 겪어내기 위한 결단이었다. 그는 단순히 관찰자의 시선으로 광부를 바라보는 데 그치지 않고, 스스로 갱도 깊숙이 들어가 막장 노동자가 되어 석탄을 캤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동료들과 함께 땀 흘리며 겪은 실존적 고뇌는 훗날 ‘식사’, ‘광부 초상’ 등 그의 대표작들로 승화되었다. 신경림 시인은 그를 두고 "목에 힘을 주는 화가가 아니라 삶의 진실을 배워 화폭에 옮기는 화가"라며 극찬하기도 했다.황 화백의 작업 방식은 독창적이고도 처절했다. 그는 갱도 안의 공기를 화폭에 담기 위해 캔버스 위에 실제 석탄 가루를 섞은 물감을 사용하거나 흙과 같은 혼합 재료를 썼다. 1985년부터 시작해 20여 년이 지난 2007년에야 완성한 ‘식사 Ⅱ’는 좁은 갱도 안에서 식사하는 광부들의 모습을 통해 인간의 존엄과 생존의 무게를 묵직하게 전달한다. 그는 탄광이라는 특수한 공간을 넘어 한국의 산세를 담은 ‘백두대간’ 연작에도 수십 년을 매달렸다. 지각 변동을 뚫고 솟아오른 땅의 역동적인 생명력을 그리며, 억눌린 자들이 뿜어내는 에너지를 예술로 승화시키고자 노력했다.생전 고인은 자신을 수식하는 ‘광부 화가’라는 호칭에 대해 남다른 철학을 피력했다. 그는 세상 어디든 희망이 보이지 않는 곳이 곧 ‘막장’이라며, 자아를 실현하지 못한 채 일상에 매몰되어 살아가는 현대인들 역시 또 다른 의미의 광부라고 말했다. 서울이나 부산 같은 대도시에도 본성을 잃어버린 채 살아가는 수많은 광부가 존재한다는 그의 통찰은 노동의 가치가 소외된 현대 사회를 향한 날카로운 경종이었다. 그는 자신의 그림이 이 시대의 모든 ‘광부’에게 작은 위로와 이야기가 되기를 간절히 바랐으며, 화폭을 통해 그들의 고단한 삶을 보듬고자 했다.고인의 예술적 업적은 대외적으로도 높게 평가받았다. 2016년 제1회 박수근 미술상을 수상하며 한국 리얼리즘 회화의 정통성을 잇는 작가로 공인받았고, 2021년에는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대규모 개인전 ‘회천(回天)’을 열어 평생의 작업 세계를 대중 앞에 펼쳐 보였다. 유가족 측은 고인이 40여 년간 쥘 흙은 있어도 뉠 땅은 없던 소외된 이들의 실존을 담기 위해 질긴 고무를 씹는 것과 같은 고통스러운 작업 여정을 이어왔다고 회고했다. 노동하는 인간의 숭고함을 증명하려 했던 화가의 치열했던 붓질은 이제 영원한 안식에 들어갔다.황재형 화백의 빈소는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되었으며, 아내 모진명 씨와 아들 제윤 씨, 딸 정아 씨가 슬픔 속에 조문객을 맞이하고 있다. 발인은 오는 3월 1일 오전 7시 40분에 엄수될 예정이다. 고인이 평생을 바쳐 그려낸 광부의 얼굴과 강원도의 풍경들은 이제 국립현대미술관을 비롯한 주요 미술관의 소장품으로 남아 그가 찾고자 했던 '현장의 진실'을 후대에 전하게 되었다. 척박한 땅에서 피어난 그의 예술혼은 한국 미술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채, 그가 그토록 사랑했던 태백의 노을처럼 짙은 여운을 남기며 우리 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