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인들이 '아리랑'을 부르고 한국인들이 '돈판부시'를 연주하는 무대가 온다!

 오는 20일, 일본 오사카에 위치한 주오사카한국문화원 누리홀에서 한국과 일본의 젊은 음악가들이 함께하는 뜻깊은 공연이 펼쳐진다. 김혜수 원장이 이끄는 주오사카한국문화원은 일본 민주음악협회 및 국립부산국악원과 협력하여 이번 특별 공연을 준비했다고 11일 공식 발표했다.

 

이번 행사는 한일 국교 정상화 60주년을 기념하는 의미 있는 자리로, 양국의 청년 예술가들이 한 무대에서 예술적 교감을 나누며 문화 예술을 통한 우호 증진을 도모하는 데 목적이 있다. 특히 전통 음악이라는 공통 분모를 통해 서로의 문화를 이해하고 존중하는 기회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한국 측에서는 국립부산국악원 소속 연주자들이 참여한다. 대금 연주자 오경선, 해금 연주자 한수지, 남도 민요 소리꾼 신진원, 그리고 장구 연주자 이진희가 한국의 전통 음악의 아름다움을 선보일 예정이다. 이들은 모두 자신의 분야에서 뛰어난 기량을 인정받은 젊은 음악가들로, 한국 전통 음악의 현재와 미래를 대표한다.

 

일본 측에서는 쓰가루 샤미센(일본의 전통 현악기) 연주자 아사노 쇼, 25현 고토(일본의 전통 현악기) 연주자 혼마 다카시, 그리고 전통북 연주자 사마코토 마사유키가 참여한다. 이들 역시 일본 전통 음악계에서 주목받는 젊은 인재들로, 일본 고유의 음악적 색채를 선보일 것으로 기대된다.

 


이번 공연의 하이라이트는 양국 음악가들의 협연 무대다. 한국과 일본의 전통 악기들이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독특한 화음과 리듬은 관객들에게 새로운 음악적 경험을 선사할 것이다. 특히 한국의 대표적인 민요 '아리랑'과 일본의 유명 민요 '돈판부시'를 함께 연주하고 노래하는 순간은 양국 문화의 조화로운 만남을 상징적으로 보여줄 것으로 기대된다.

 

김혜수 주오사카한국문화원장은 "이번 공연은 단순한 문화 교류를 넘어 차세대 예술가들이 국제적 감각을 키우고 서로의 음악적 감성을 공유하는 소중한 기회"라고 강조했다. 또한 "한일 양국의 젊은 음악가들이 함께 만들어가는 이 무대가 양국 간 문화적 이해를 높이고 우호 관계를 더욱 돈독히 하는 데 기여하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이번 공연은 한일 양국의 문화적 다양성을 존중하면서도 음악이라는 보편적 언어를 통해 소통하는 장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특히 전통 음악을 현대적 감각으로 재해석하고 양국의 음악적 요소를 융합하는 시도는 전통 예술의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하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한일 국교 정상화 60주년을 맞이하는 올해, 이러한 문화 교류 행사는 양국 관계의 미래지향적 발전에 중요한 밑거름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오는 20일 오사카 누리홀에서 펼쳐질 이 특별한 음악회는 무료로 진행되며, 한국과 일본의 전통 음악에 관심 있는 누구나 참석할 수 있다.

 

문화포털

세 번 숙청당하고 돌아와 중국 4100년의 굶주림을 끝낸 지도자

 1978년, 중국의 1인당 소득은 156달러에 불과한 절대 빈곤 국가였다. 그러나 40여 년이 흐른 지금, 중국은 미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G2 경제 대국으로 우뚝 섰다. 이 경이로운 '대굴기(大崛起)'의 중심에는 '작은 거인' 덩샤오핑(鄧小平)이 있었다. 그는 국가 주석이나 총리 같은 공식적인 최고 직책 없이, 오직 실용주의 리더십 하나로 중국 대륙을 천지개벽시켰다.덩샤오핑의 정치 인생은 그야말로 '삼전삼기(三顚三起)', 즉 세 번의 실각과 세 번의 복권으로 점철된 파란만장한 여정이었다. 마오쩌둥의 급진적인 정책에 반대하다 '우경 기회주의자'로 낙인찍혔고, 문화대혁명 시기에는 '자본주의 길을 걷는 실권파'로 몰려 모든 직위를 박탈당하고 공장으로 하방되는 수모를 겪었다. 평생의 정치적 동지였던 저우언라이의 사망 이후에는 '반당·반사회주의의 원흉'으로 지목되어 세 번째 시련을 맞았다.그러나 157cm의 작은 체구에 담긴 그의 정치적 생명력은 끈질겼다. 1977년, 73세의 나이로 세 번째 복권에 성공한 그는 1년 뒤 중국 현대사의 물줄기를 완전히 바꾸는 승부수를 던진다. 1978년 12월, 그는 '4개 현대화' 노선을 발표하며 개혁·개방 정책의 서막을 열었다. 그의 철학은 명료했다. "고양이 색이 검든 희든 쥐만 잘 잡으면 된다"는 '흑묘백묘론'으로 대표되는 극단적 실용주의였다. 이념 논쟁으로 허송세월할 것이 아니라, 인민을 배불리 먹이는 것이 최우선이라는 것이었다.개혁은 농촌에서부터 시작됐다. 집단농장인 인민공사를 과감히 해체하고, 농민들이 자발적으로 시작한 '가정연산승포책임제'를 전국으로 확대했다. 이는 사실상 토지를 가족 단위로 나누어 경작하고, 남는 생산물은 시장에 팔 수 있게 한 조치였다. 결과는 놀라웠다. 1979년 시범 마을의 식량 생산량은 6배나 폭증했고, 1984년에는 중국 5000년 역사상 처음으로 만성적인 식량 부족 문제가 해결됐다. 10억 인민을 굶주림에서 해방시킨, 역사상 최초의 지도자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농업의 성공을 발판으로 그는 선전, 주하이 등 4개의 '경제특구'를 설치해 자본주의 실험에 착수했다. 외국 자본과 기술을 받아들이기 위해 세금을 감면하고 규제를 철폐하자, 인구 3만의 작은 어촌이었던 선전은 불과 10여 년 만에 100만 인구의 현대 도시로 탈바꿈했다.1989년 톈안먼 사태와 1991년 소련 붕괴로 개혁·개방이 좌초될 위기에 처하자, 88세의 노정객은 다시 한번 직접 나섰다. 1992년 남부 지역을 순회하며 "개혁·개방을 더욱 가속화해야 한다"고 역설한 '남순강화(南巡講話)'는 보수파의 저항을 잠재우고 중국 경제가 '세계의 공장'으로 도약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흥미로운 점은 그가 내세운 '사회주의 시장경제'라는 구호다. 필자의 지적처럼, 이는 '네모난 원'과 같은 형용모순이다. 공산당 일당 독재라는 정치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자본주의'라는 금기어를 피하고 만들어낸 정치적 수사에 불과했다. 본질은 사유재산과 경쟁을 도입한 '자본주의 시장경제'였다. 덩샤오핑은 공산주의라는 껍데기는 유지하되, 그 안의 내용물은 자본주의로 채워 부유하고 강력한 중국을 만드는 길을 택했던 것이다. 이 위대한 속임수야말로 그의 가장 빛나는 업적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