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실 봉쇄에 펜싱팀 장비 없이 출전

 대한민국 펜싱 국가대표팀이 정치적 시위의 여파로 본인의 장비조차 챙기지 못한 채 국제대회 출길에 오르는 황당한 사건이 발생했다. 오상욱을 비롯한 대표팀 선수들은 16일 아시아선수권대회가 열리는 인도 뉴델리로 향했으나, 평소 손에 익은 칼과 재킷 대신 급조한 장비들을 가방에 담아야 했다. 지방선거 개표소였던 올림픽공원 핸드볼경기장이 투표용지 부족 사태를 규탄하는 시위대에 의해 완전히 봉쇄되면서 경기장 내 협회 사무실에 보관 중이던 개인 장비 반출이 불가능해졌기 때문이다.

 

이번 사태는 단순한 물품 미지참을 넘어 국가대표팀의 행정 시스템 자체를 마비시켰다. 시위대가 경기장 입구를 원천 차단하면서 대한펜싱협회 직원들은 사무실에 진입하지 못했고, 이로 인해 대회의 기초적인 참가비 송금 업무부터 차질을 빚었다. 선수들은 출국 직전까지 장비를 구하기 위해 동분서주했으며, 결국 동료 선수들의 예비 장비를 빌려 신발과 옷을 맞추는 등 그랜드슬램급 대회를 앞두고 최악의 컨디션 난조를 겪게 되었다.

 


핸드볼경기장에는 펜싱 외에도 핸드볼, 산악, 우슈 등 총 9개 종목 단체가 입주해 있어 체육계 전체가 마비 상태에 빠졌다. 대한체육회는 시위 장기화로 인해 지도자 보수 지급과 세금 납부 등 필수 행정 업무가 중단되었으며, 특히 100일도 남지 않은 아이치·나고야 아시안게임 준비에 막대한 차질이 생겼다고 호소했다. 매일 아침 사무실 출근을 시도하는 직원들과 이를 막아서는 시위대 사이의 대치가 반복되면서 체육 단체들의 기능은 사실상 멈춰 섰다.

 

정치권에서도 이번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중재에 나섰으나 상황은 여의치 않다.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는 직접 시위 현장을 찾아 국가대표 선수들의 앞길을 막는 행위는 명분을 잃는 일이라며 시위대의 협조를 강력히 촉구했다. 장 대표는 중계 카메라 설치 등 시위대의 요구 조건을 수용하는 대신 체육회 직원들의 출입을 허용하는 합의안을 제시했으나, 일부 강경파 시위자들의 반발과 추가 확인 요구가 이어지며 합의는 현장에서 무산되었다.

 


선수들이 참가하는 아시아선수권은 올림픽 및 세계선수권과 더불어 세계 랭킹 포인트가 걸린 매우 중요한 대회다. 펜싱 강국인 한국으로서는 최상의 전력을 다해야 하는 무대임에도 불구하고, 선수들은 본인의 체형에 맞춘 특수 장비 없이 경기를 치러야 하는 불리한 조건에 놓였다. 시위대가 전자기기 반출 금지 등을 명분으로 내세워 체육 단체의 행정용 컴퓨터와 선수들의 경기용 장비까지 묶어두면서 스포츠 현장이 정치적 갈등의 볼모가 되었다는 비판이 거세다.

 

현재 핸드볼경기장 주변은 여전히 시위대와 경찰, 체육회 관계자들이 뒤섞여 극도의 혼란이 이어지고 있다. 장동혁 대표의 중재안 발표 이후에도 현장에서는 세부 이행 조건을 둘러싼 실랑이가 계속되면서 대한체육회의 정상적인 업무 복귀는 기약 없이 미뤄진 상태다. 인도 뉴델리에 도착한 펜싱 대표팀은 현지에서 대체 장비 적응 훈련에 돌입할 예정이지만, 본인의 장비 없이 세계 정상급 기량을 발휘할 수 있을지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는 커지고 있다.

 

문화포털

호크니 별세에 전 세계 애도…회화의 전설 지다

 20세기와 21세기를 관통하며 현대 미술의 지평을 넓힌 거장 데이비드 호크니가 89번째 생일을 앞두고 자연의 품으로 돌아갔다. 호크니의 대변인은 그가 지난 11일 런던 자택에서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평온하게 생을 마감했다고 공식 발표했다. 노년의 나이에도 아이패드를 들고 프랑스 노르망디의 봄을 그리며 멈추지 않는 창작욕을 과시했던 그였기에, 갑작스러운 비보는 전 세계 팬들에게 커다란 상실감을 안겼다. 그는 주류 사조에 휩쓸리지 않고 자신만의 독창적인 시각 언어를 구축하며 회화의 본질을 탐구해온 시대의 목격자였다.호크니의 예술 인생은 시작부터 파격과 도전의 연속이었다. 추상표현주의가 화단을 지배하며 구상 미술의 종말을 예고하던 1950년대, 그는 오히려 인간의 형상과 일상의 풍경을 캔버스에 담아내며 주류 미술계에 반기를 들었다. 회화는 인간이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을 공유하는 도구여야 한다는 그의 신념은 훗날 영국 팝아트의 부흥을 이끌었으며, 개인적인 서사와 문학적 감수성을 결합한 독특한 화풍을 완성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그는 유행을 쫓기보다 자신의 정체성과 주변의 소중한 관계들을 투명하게 드러내는 길을 택했다.그의 작품 세계에서 빼놓을 수 없는 상징은 1960년대 미국 캘리포니아 이주 이후 탄생한 '수영장 시리즈'다. 영국의 우중충한 날씨를 벗어나 마주한 LA의 강렬한 햇빛과 자유로운 분위기는 그에게 예술적 해방감을 선사했다. 찰나의 물보라를 포착하기 위해 수주간 붓질을 거듭했던 그의 집요함은 '더 큰 첨벙'과 같은 걸작을 낳았고, 이는 현대인의 고독과 정적인 아름다움을 동시에 담아냈다는 평가를 받는다. 특히 그의 연인이자 제자였던 피터 슈레진저를 모델로 한 작품은 경매에서 생존 작가 최고가를 경신하며 거장의 위상을 입증하기도 했다.호크니는 카메라 렌즈가 왜곡하는 인간의 시각 원리를 바로잡기 위해 평생을 바친 혁명가이기도 했다. 그는 단일 시점의 원근법을 '시각의 감옥'이라 비판하며, 수백 장의 사진을 이어 붙인 포토 콜라주 실험을 통해 입체적인 공간감을 구현했다. 화면 밖 관람객을 향해 소실점이 뻗어 나오는 역원근법의 도입은 감상자가 그림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듯한 몰입형 경험을 선사했다. 이러한 시각적 탐구는 그가 단순히 대상을 묘사하는 화가를 넘어, 공간과 시간을 캔버스 위에 재구성하는 철학자였음을 보여준다.디지털 기술을 예술의 도구로 적극 수용한 얼리 어답터로서의 면모는 젊은 세대에게 그를 '가장 힙한 노화백'으로 각인시켰다. 70대 중반에 접어든 나이에도 아이패드를 스케치북 삼아 빛의 미묘한 변화를 기록했던 그는, 팬데믹으로 고립된 인류에게 수선화 그림과 함께 "봄은 취소되지 않는다"는 희망의 메시지를 건네며 예술의 사회적 가치를 몸소 실천했다. 육체적 난청과 노년의 고독 속에서도 그는 자연의 색채를 더욱 밝고 투명하게 그려내며 생명의 경이로움을 찬양하는 데 남은 생을 온전히 바쳤다."예술가는 은퇴하지 않는다"는 자신의 말처럼 호크니는 마지막 순간까지 창작의 끈을 놓지 않았다. 찰스 3세 영국 국왕은 그를 독창성의 화신이라 추모하며, 그의 창의성이 전 세계 미술관에서 영원히 살아 숨 쉴 것이라고 경의를 표했다. 한국에서도 대규모 전시를 통해 수십만 명의 관람객에게 감동을 주었던 그는 이제 전설이 되어 우리 곁을 떠났다. 하지만 그가 남긴 찬란한 원색의 풍경과 인간에 대한 따뜻한 시선은 앞으로도 수많은 이들에게 세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눈이 되어줄 것이다.